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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1 21:02:01 수정 : 2017.01.12 09:34:11 달포 전 쓴 칼럼


[경향의 눈]나비 효과 +α

영국 식민지 시절 미국에서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은 브랜디나 와인보다는 값싼 럼을 즐겨 마셨다. 미국 정착민들은 구하기 쉽고 싼 카리브해 당밀을 수입해 럼을 만들었다. 그러자 영국은 1733년 프랑스령 카리브산 당밀에 높은 수입관세를 매기는 ‘당밀 조례’를 발표했다. 식민지 사람들에게 영국산 당밀을 사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조례는 미국 하층 노동자들까지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게 하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미국 2대 대통령이던 존 애덤스는 1818년 8월11일 친구 윌리엄 튜더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난 당밀이 미국 독립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왜 얼굴을 붉혀야 하는지 모르겠어. 수많은 위대한 사건들이 그보다 훨씬 사소한 이유에서 기인했지 않았나.”(에이미 스튜어트 <술 취한 식물학자> 발췌)

어마어마한 사건이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 경우는 부지기수다. 돌이켜보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 등 언론의 끈질긴 취재와 보도 노력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어찌보면 사소한 두 사건이 엮이면서 초대형 게이트로 비화한 것은 공교롭다.

2015년 7월 검찰은 해외 원정 도박장을 운영한 혐의로 범서방파 행동대장 이모씨를 체포했다. 조사과정에서 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대표가 100억원대의 도박을 한 게 드러났다. 정 대표가 선임한 판사 출신 최유정 변호사는 부당 수임료를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정 대표가 앞서 다른 도박사건에서 전관인 홍만표 변호사를 선임한 게 드러났고, 홍만표 변호사-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진경준 전 검사장 연줄이 나왔다. 진 전 검사장은 게임회사 넥슨으로부터 주식을 받았고 우 전 수석 처가는 넥슨과 부동산 거래를 한, 그들만의 내밀한 속사정도 드러났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경향신문 자료사진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때만 해도 사건은 법조 비리에 머물렀다. 한데 청와대가 끼어들어 우 전 수석을 비호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그 뒤 K스포츠재단과 미르재단 설립, 삼성 등 재벌 민원 청탁, 최순실씨의 국정 개입, 박 대통령 세월호 7시간 행적, 최씨 딸 정유라씨 이화여대 부정입학,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일파만파(一波萬波)로 번졌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법꾸라지(법률 미꾸라지)’들과 정치꾼들, 정권의 부역자들이 청와대에서 농성을 하며 빠져나갈 길을 찾았지만, 하늘이 내려다보고 땅이 올려다보는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벗어나지 못했다. 

최순실씨/경향신문 자료 사진최순실씨/경향신문 자료 사진


정유라씨 개도 뜻밖의 역할을 했다. 최순실씨는 3년 전 정씨 개를 최측근인 고영태씨에게 맡겼다. 고씨는 최씨가 설립한 ‘더블루K’ 이사다. 고씨는 운동을 하느라 개를 혼자 두고 나갔고, 그 때문에 최씨와 고씨 사이가 틀어졌다. 고씨는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개 문제로) 최씨가 모욕적인 말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씨는 최씨가 박 대통령 옷을 맞추는 곳에 카메라를 설치해 녹화한 뒤 언론에 제보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나비 효과’의 실증(實證)이다. 이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나비 날갯짓이 미국 뉴욕을 강타하는 허리케인이 된다는, 작은 사건이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는 과학 이론이다. 다만 박·최 게이트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것도 한 방향으로 비가역적으로 진행되는 나비 효과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바로 시민들의 개인적, 집단적 의지가 개입된 점이다. 사감이 있었지만 고영태씨는 언론 제보를 하고, 검찰 수사에 응하는 내부 고발자 역할을 했다. 노승일 전 K스포츠재단 부장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면서도 국회에서 증언을 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 TV조선, JTBC에는 시민 제보가 줄을 이었다. 의혹 내용을 직간접으로 확인해주거나, “답변할 수 없다”면서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정부와 업계 관계자들도 있었다. 


“최순실 이름도 못 들어봤다”던 대표 법꾸라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꼬리를 밟은 이는 평범한 누리꾼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주식갤러리(주갤러)’ 이용자가 제보한 동영상에는 2007년 최태민, 최순실 관련 의혹을 해명하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선 후보와 박 후보 법률지원단장이던 김기춘 전 실장 모습이 생생하게 잡혀 있다. 

촛불시위/경향신문 자료 사진촛불시위/경향신문 자료 사진


무엇보다 노동에 지친 피곤한 몸을 쉴 금쪽같은 토요일, 볼이 빨갛게 언 아이들과 촛불을 들고 나온 1000만 시민이 있었다. 이들은 검질기게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대통령 하야와 탄핵을 부르짖었다. 전체주의와 사상 통제를 통렬하게 비꼰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기만의 시대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혁명적 행동”이라고 말했다. 신실하고 선량한 절대군주인 양 치장한 대통령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것, 거짓의 둥지로 전락한 청와대 앞에서 촛불을 드는 행위 자체가 혁명적 행동이다. 촛불의 미약한 일렁임이 일으킨 파동은 혁명의 열풍으로 완성돼 가고 있다.

Posted by 최우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