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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6 21:13:41

집권 후 모든 분야를 망가뜨린, 심지어 ‘보수가 경제는 잘한다’는 잘못된 신화마저 깬 이 정권이 잘하는 게 하나 있다. 시간 벌기다. 박근혜(일명 ‘길라임’) 정권을 지탱해온 기제(機制)는 딱 이거 하나다. 불리한 상황이 되면 침잠해 버텼다. ‘개·돼지 같은’ 민중이 뭐라고 하든, 시간을 보내면 됐다. 배곯고 고달픈 시민은 지레 지치기 마련. 그래서 ‘흐지부지’는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사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한 손이 잘린 뒤 수감된 이강희 논설주간은 이런 통화를 한다.

“우린 끝까지 질기게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나라 민족성이 원래 금방 끓고 금방 식지 않습니까. 적당한 시점에서 다른 안줏거리를 던져주면 그뿐입니다.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싶은 얘기는 고민거리를, 울고 싶은 얘기는 울 거리를, 욕하고 싶어 하는 얘기는 욕할 거리를 주는 거죠. 열심히 고민하고 울고 욕하면서 스트레스를 좀 풀다 보면은 제 풀에 지쳐 버리지 않겠습니까. 예? 오른손이오? 까짓 거 왼손으로 쓰면 되죠.”

과연, 얼마 전까진 그랬다. 세월호 참사가 터진 게 947일 전인 2014년 4월16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뺨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 않는, 본능마저 거스르는 놀라운 모습을 연출한 사과 이외에 한 것이 없다. 진상규명에 부정적 입장을 가진 이들을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보내 훼방 놓았다.

특조위 활동 연장 문제를 놓고 박 대통령은 “국민 세금이 많이 들어가는 문제”라고 했다. 시민 300여명이 생짜로 숨진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세금을 더 쓰면 안된다는 것이다. 참사가 난 지 2년이 넘어 시민들의 피로도가 올라갈 즈음이었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월호 천막 농성장을 향해 “이제 그만하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던 차다. 9월30일 정부 방침에 따라 특조위 활동은 종료됐다. 시간은 세월호 유가족들 편이 아닌 듯했다.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도 마찬가지다.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서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투병 317일 만에 숨졌지만, 정부와 보수 측에선 진상규명보다는 ‘부검 논란’을 부채질했다. 371일째인 현재까지 그 누구도 책임을 졌다거나 처벌됐다는 소식은 안 들렸고,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던 차다. 

국가가 책임지겠다던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 예산 미배정,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 군사정권 때나 있던 역사교과서 국정화, 지역주민뿐 아니라 주변국과도 마찰을 빚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등에서도 박근혜 정권은 시간을 무기로 내세웠다. 한때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가 곧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축소되고, 더 시간이 흐르면 “반대를 위한 반대” 혹은 “종북주의자들의 악머구리” 프레임에 갇혔다. 

정권의 내부자와 공모자들은 대중들이 떠들다 입을 닫을 때까지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송로버섯 요리를 먹고, 명품 구두를 신었다. 빌딩을 사고, 고급 외제 승용차, 승마, 해외여행을 즐겼다.

그러다 파탄(破綻)이 났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얼마나 가겠나” 했겠지만, 두 달째다. 박 대통령은 으레 시간 벌기로 일관했다. 첫 보도가 나고 35일 만에 90초짜리 녹화 사과를 했다. 간을 보다가 지지율이 5%까지 폭락하자 열흘 뒤 재차 사과를 했다. 박 대통령은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고 했다. 하나, 그를 대리하는 유영하 변호사는 “사실관계를 대부분 확정한 뒤 대통령을 조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했다. 관계자들 수사가 끝나려면 수개월이 걸릴 것이다. 

흥분하면 속을 고스란히 드러내 어찌보면 순진한 것 같기도 한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15일 이런 말을 했다. “대통령은 지금 어떤 사안이 터진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 노력에 따라 회복될 수 있는 지지율이라고 본다.” 이번에도 시간은 박근혜 정권 편일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최근 미국 덴버대학교 정치학과 에리카 체노웨스 교수의 3.5% 법칙이 부각되고 있다. 1900년에서 2006년까지 발생한 시민 저항 운동을 분석해봤더니 한 국가 인구의 3.5%가 집회 및 시위를 지속할 경우 정권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다만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시위, 비폭력 시위’라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한국 인구 3.5%이면 180만명 정도다. 이들이 시간의 무게를 버티면, 정권은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다. 

외국 교수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은 이미 알고 있다. 시간은 힘센 이의 편이 아니다. ‘흐지부지’를 거부하는, 끈질긴 이의 편이다. 영화 속 이강희 주간과 달리 박근혜 정권은 이미 오른손을 잃었고, 이제 왼손도 잃고 있다.

Posted by 최우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