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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들

아일랜드 출신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18세기에 걸작 <걸리버 여행기>를 냈다. 주인공 걸리버는 소인국, 거인국, 하늘을 나는 섬나라, 말(馬)의 나라를 다녀온다. 기발한 상상력의 이 동화를 어릴 적 다락방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코를 박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를 축약본이 아닌 원본으로, 성인의 눈으로 보면 느낌이 확 다르다. 구절구절 인간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비꼰다.
 
의사 걸리버가 탄 배가 조난을 당한다. 구사일생으로 도착한 곳은 소인국 릴리풋(Lilliput).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객쩍다.

고관이 되려면 귀족이나 학자 출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관이 죽거나 파문을 당하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후보들이 줄을 타며 춤을 춰 황제와 궁중사람들을 흥겹게 해줘야 한다. 떨어지지 않고 가장 높이 오른 이에게 고위직이 돌아간다. 각료도 종종 줄타기 춤을 춰 기술을 잃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한다.

이곳엔 두 정당이 있다. 구파 트라멕산당(Tramecksans) 소속은 높은 굽을 신는다. 신파인 슬라멕산당(Slamecksans)은 낮은 굽을 신는다. 양측은 어떤 굽이 편한지를 놓고 70개월 이상 다투고 있다. 서로 외면하고 말도 않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도 안한다. 황제는 한쪽 발에는 높은 굽, 다른 쪽에는 낮은 굽의 신을 신고 뒤뚱거린다. 궁내대신 렐드러설은 “이대로 가다가 국민 전부가 당과 당으로 나뉘어 큰 소동을 벌일 것 같다”고 걱정한다.

스위프트는 이 작품에서 다층적인 구조로 인간을 발가벗기고 조롱한다. 황제는 걸리버 손가락만하다. 그에게는 지구 구석구석까지 지배하는 ‘우주의 기쁨이자 두려움’이라는 어마어마한 칭송이 붙는다.

실력은 필요없다. 말 그대로 ‘줄타기’만 잘하고 퍼포먼스(깜짝쇼든, 선언이든, 고소·고발이든)만 잘하면 된다. 다툼 이유도 하찮기 짝이 없는 구두 굽 높이 때문이다.
 
책에서 눈을 떼서 여의도를 돌아봤다. 최근 여든, 야든 쇄신한다, 당을 고친다고 법석을 떤다. 안에서는 자기들끼리 싸우고, 상대당과는 전쟁에 가까운 다툼을 벌이고 있다. 국회의원, 당 지도부가 되는 데 실력보다 줄타기와 화려한 퍼포먼스가 중요한 듯하다. (고백하건대, 이 문장을 쓰면서 한 개그맨이 생각났다. ‘모욕죄로 고소당하는 거 아닌가’ 하며 쫄기도 했으나, 내친김에 썼다.)



여당 다툼의 중심에는 한 유력자가 있다. ‘1등신문’이 만든다는 종합편성채널은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후광)’라고 칭송했다. 그 당 의원들도 “전화해도 안 받고, 만나주지도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가히 ‘우주의 기쁨’급 추종이다. 재창당이냐, 재창당 ‘수준’으로 혁신하느냐를 놓고 죽기살기로 다퉜다. 당명도 바꾸네, 마네 한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야권을 통합한다면서 전당대회를 ‘독자적으로’ 하자, ‘통합형으로’ 하자고 앙앙불락했다. 오랜만에 철제의자 공중부양, 액체 살포, 주먹질도 나왔다. 예서 멈추지 않고 전대 효력을 놓고 소송까지 하고 있다.



당파끼리, 정당끼리 다툴 수 있다. 자신들에게는 ‘죽기살기’ 문제일 것이다. 결국 정치는 싸움이고, 궁극의 목표는 정권 쟁취니까.

하지만 시민, 유권자가 이런 식의 행태를 원할까. 명분 내세우기, 말싸움, 얼굴 붉히기, 삐치기.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줄타기를 하고, 아니면 ‘일반인’은 들어가지도 못하는 국회 의원총회장에 문 닫고 앉아 서로 옳다고 입씨름하는 것일까. 결정적으로, 국민에게 뭘 할지 물어나 봤나.

시민은, 유권자는, 그리고 지지자들은 진정한 반성과 쇄신, 비전과 실천을 원할 것이다. 그들을 위해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갖고 경쟁해야 한다.

그게 아닌 지금 같은 다툼은 하릴없다. 걸리버 눈높이의 유권자들이 보기에 그저 6인치(15.2㎝) 크기 소인들이 1㎝ 안팎의 구두 굽 높이를 놓고 싸우는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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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우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