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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와 무학 대사가 농을 주고받았다. 대업을 이룬 군주와 고승이지만, 왜 안 그랬겠나.

태조가 “내가 자세히 보니 대사 모습이 마치 돼지 같구려”라고 하자, 무학 대사는 “대왕께서는 부처님같이 생기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놀란 건 태조다. “농을 했는데, 어찌 덕담을 하시오”라고 물었다.

무학 대사가 답했다.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의(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矣).”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태조는 졸지에 돼지가 됐다. 군왕을 놀렸으니 목이 달아날 일이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신랄한 풍자 속에서 물아일체까지 설파하니 무애의 경지에 다다랐다 할 수 있다.

영어 표현 중 ‘It takes one to know one’이라는 게 있다. 비난하는 사람이 비난받은 사람의 결점을 가졌다는 뜻. 우리 속담으로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다.

모두 자신의 처지, 눈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아무리 배움을 쌓고 경험을 많이 하더라도 눈높이는 대저 자신의 처지에 터잡은 것일 뿐이다.

곤궁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다. 제 눈높이에서 사안을 재단해 위로한답시고 나섰다가는 상대를 더욱 난처하게 할 수 있다. 약 올리는 지경을 넘어 비탄케 할 수 있다.

대통령 힐난하는 게 어쩌다 국민 스포츠처럼 된 건지 안타까운 일이다. 거기에 덧없는 한 줄을 보태는 것 같지만, 짚고 넘어가야겠다. 박근혜 대통령은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라. 다 어디 갔냐고, 다 중동 갔다고…”라고 했다. 그는 그 직전 “국내(청년 일자리)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는 여기대로 하면서, 청년들이 지금이라도 빨리 해외에서라도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적극 노력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농처럼 중동 이야기를 했다.

박 대통령은 몸소 구직의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직장을 얻을 나이에 ‘어쩔 수 없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고, 그 뒤로도 피고용인으로서 살아 본 적이 없다.

그가 보기에 일자리 찾기는 선친 집권 시절 중동 진출이나 독일 광부·간호사 파견 등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마침 직전 중동 순방도 다녀왔다. 그래서 자연스레 나온 발언이 “중동 가라”다.

청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어이쿠, 망극하옵니다”라고 했을까. 천만의 말씀. 대가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치렀다.

김 대표는 지난 23일 서울 신림동 고시촌을 방문했다. 청년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젊은이들은 ‘청년들 중동이나 가라? 너나 가라 중동!’이란 항의 손팻말을 들었다.

홍준표 경남지사도 농담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말로 구설의 중심에 섰다. 11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먹으러 가는 곳이 아닙니다. 공부보다 급식에 매몰돼 있는 진보좌파 교육감님들의 편향된 포퓰리즘이 안타깝습니다.”

홍 지사는 학교 무상급식비 예산 지원을 중단키로 했다. 그 돈을 서민 학생 학원 지원비로 쓰려고 한다. 지원비를 받으려면 저소득 가정임을 증명해야 한다. ‘가난 증명서’를 내야 학원비와 무상급식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어려서 가난했다. 중학교 시절 도시락을 쌀 수 없어 점심 시간에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당초 육군사관학교로 가려다 법대-검사로 진로를 바꿨다. 아버지가 비료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면서다. 검사는 권력을 쥔 사람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처단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권력을 쥔 그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가난 증명서’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의 하소연은 들리지 않는 것일까. 그들 요구는 좌파 포퓰리즘인가.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왼쪽)가 16일 경남 마산시 마산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도민과 함께 희망경남 만들기' 대회에서 같은당 홍준표 경남지사후보와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근대 과학의 선구자 아이작 뉴턴은 “내가 좀 더 앞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을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했다. 겸양이나, 그 또한 옳다. 아무리 천재라도 오롯이 홀로 그 업적을 다 이룰 수 있었겠나.

박 대통령이나 홍 지사라면 능력과 그 지위 덕에 남보다 어렵지 않게 그런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설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지금 행태는 거인은커녕 수돗물을 마시던 소년 홍준표, 이역만리로 떠나야 했던 젊은이를 안타까워하던 청년 박근혜의 눈높이가 아니다. 오히려 왜곡된 기억과 비뚤어진 신념 때문에 자식을 잡아 먹은 거인 크로노스처럼 세상을 조감하는 듯하다.

부처와 거인은 고사하고, 그저 돼지 눈높이에서 먹을 것이라도 제대로 건사해달라고 빌어야 할 지경이다. 농담이 아니다.


최우규 산업부장

Posted by 최우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