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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7월10일 한 유력 정치인의 연설은 반향을 일으켰다.


 “어떤 국민도, 홀로 뒤처져 있지 않게 할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같이 갈 것이다. ‘원칙을 잃은 자본주의’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리 국민은 불안하다.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을 국가에서 국민으로, 개인의 삶과 행복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경제민주화 실현’ ‘일자리 창출’ ‘한국형 복지의 확립’을 국민행복을 위한 3대 핵심과제로 삼겠다. 우리 경제는 효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공정성의 중요성을 간과했고, 그 결과 경제주체 간에 격차가 확대되고, 불균형이 심화돼 왔다.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일은 시대적 과제다. 불필요한 규제는 철폐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지만, 영향력이 큰 기업일수록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데는 과감하고 단호하게 법을 집행하는 정부를 만들겠다. 복지가 국민 개개인이 가진 역량을 뒷받침하고 끌어내서 자립·자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경제와 복지의 선순환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가겠다. 복지수준과 조세부담에 대한 ‘국민대타협’을 추진하겠다. 공교육 내실화를 확실하게 실현해 사교육비를 줄이고, 교육 기회 격차도 줄이겠다. 남북 간 불신과 대결을 끊고 신뢰와 평화의 새로운 한반도를 향한 첫걸음을 시작하겠다. 정부 부처 사이 칸막이를 해소해 모든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고, 공유된 정보는 투명하게 모든 국민에게 공개할 것이다. 정치를 해오면서 제게 손해가 되더라도, 한번 드린 약속은 반드시 지켜왔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에는, 제 정치생명을 걸고 싸워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경어를 보통 말투로 바꾸고, 내용을 발췌한 것이지만 그 울림은 여전하다.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의 18대 대선 출마선언문이다. 


 보수 정당의 강력한 대선 예비후보가 경제민주화, 복지, 개인, 조세, 공교육, 투명한 정부를 천명했다. 자신들의 의제를 빼앗긴 야당과 진보 진영은 망연자실했다.


 박근혜 의원이 누군가. 원칙과 신뢰를 기치로 내세웠던 이다. 이를 위해 자당 소속 이명박 대통령에게 수차례 맞섰다. 당내 갈등도 불사했다. 미생지신(尾生之信) 논란이 대표적이다.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 미생은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기다렸다. 여자는 오지 않고 소나기로 물이 밀려왔으나 미생은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리다 숨졌다.


 이 고사는 2010년 1월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 입길에 올랐다. 세종시로 수도 기능을 옮기는 게 못마땅한 이명박 대통령은 정운찬 총리를 내세워 세종시법 수정안을 발표했다. 박근혜 의원은 ‘국민과의 약속’을 내세워 수정안을 반대했다.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는 박 의원을 겨냥해 “미생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많이 오는데도 기다리다가 익사했다”고 했다. 쓸데없는 명분만 고수하는 어리석음을 질타한 장자(莊子)식 해석이다.


 박 의원은 “미생은 진정성이 있고, 애인은 진정성이 없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되고, 애인은 평생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신의를 중시한 전국시대 책략가 소진(蘇秦) 입장이다. 박 의원은 또 “세종시 원안이 잘못된 것이라면 공약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소신이나 생각이 변했다면 판단력의 오류”라고 했다.


2010년 7월 18대 대선 출마선언을 하고 있는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 _경향신문 자료사진


 박 의원은 2012년 12월19일 대선에서 당선돼 이듬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지지자는 물론 반대파도 그라면 약속을 “손해가 되더라도”, “진정성을 갖고” 지킬 줄 알았다. “잘못된 것이었다면 공약해서는 안되고, 소신이나 생각이 변했다면 판단력의 오류”라고 했던 그이기에.


 연설을 한 지 2년3개월, 대통령이 된 지 1년8개월 됐다. 경제민주화 정책들은 실종됐고, 대기업 규제는 암덩어리 취급을 받고 있다. 복지는 뒷전이고, 서민증세만 계속되고 있다. 공교육 내실화는커녕, 그를 꾀하려는 교육감들을 정부가 막고 있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만 했지, 남북 간 불신과 대결은 계속됐다. 엊그제 대화가 시작된 건 다행이나, 물꼬를 튼 건 북측이다.


 세월호 참사 때 ‘대통령의 7시간’ 같은 정보는 감추기 바쁘다. 어떤 국민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고 있다. 삶의 울력걸음에서 뒤처진 그들을 박 대통령은 내친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생지신은 박근혜 의원의 미생지신과 같은가, 다른가. 박 대통령이 미생인가, 그가 말한 국민행복시대를 믿고 싶어했던 국민이 미생인가. 

 물이 턱밑까지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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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우규